THE ART BOOK

렘브란트 반 린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BoRu 2023. 6. 12.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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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가장 위대하고 창조적인 업적으로 여겨지는 일련의 초상화 속에는
인간이자 예술가로서 터득한 현명함이 담겨 있지만 야속하게 흐르는 시간과
인생에 닥친 불운이 가져온 파괴의 자취 또한 담아내고 있었다.

 

 

 

 

렘브란트에 대하여

 

1. 두 초상화

 

헤이그의 마우라추이스 미술관은 렘브란트의 초상화 두 점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오른쪽은 자신감으로 가득 찬 젊은 시절을 그린 1629 <훈장을 단 젊은 날의 자화상>입니다.

왼쪽은 힘없고 군살이 붙은 늙은 이가 그려져 있습니다. 두드러진 코만이 그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할 뿐입니다. 이 그림은 1669作으로 즉 렘브란트가 사망한 해에 그려진 <자화상>입니다.

이 두 초상화를 통해 우린

화가로서 렘브란트 그리고 인간으로서 렘브란트의 인생이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끝이 났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2. 화가 렘브란트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렘브란트 반 린(1606년 7월 15일 - 1669년 10월 4일)은 1631년 말, 암스테르담에 정착 후 전문 초상화가로서 큰 성공과 명성을 얻고, 점차 경제력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는 사스키아 반 웰렌부르흐와 함께한 결혼생활이었습니다.

초기에는 부모님이 가진 종교의 영향으로 성서나 문학적 주제를 섬세하게 다뤘던 소품 위주의 그림을 그렸으나 루벤스의 바로크 양식을 모방하면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화가들처럼 웅장한 규모의 작품들을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1630년대 후반까지 많은 풍경화를 그렸었는데, 등장하는 풍경들은 뿌리째 뽑힌 나무들과 불길한 하늘을 특징으로 자연적인 현상에 의해 일어나는 드라마틱한 장면을 그렸습니다.

 

 

3. 예술과 삶을 덮친 불운의 연속

 

렘브란트의 화가 인생 중 절정기를 나타내는 1642<야경순찰대>를 그린 해였습니다.

폐결핵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으면서부터 그의 그림은 덜 활기차지고 냉담해졌습니다.  후에 무리한 담보대출로 인한 파산 위기에 몰리는 등 불운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화가로서 자신의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월을 뛰어넘는 매우 인간적이고 심오한 감정들을 담아내고 있는 걸작들을 제작했는데, 이와 함께 물감의 사용법 또한 급격히 변했습니다.
금속에 반사된 빛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포착하던 젊은 시절의 작고 정교한 붓질에서 빛의 사용은 더 들쭉날쭉해지고 거칠어지며, 이내 빛을 빨아들이는 두껍고 무거운 붓질로 대체되었습니다.
당시 대표작이 바로 1666<유태인 신부>입니다. 이 작품은 노련한 솜씨로 빛과 색, 안료를 다루어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감정을 살려내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렘브란트의 드라마 같은 생애와 미술사의 한 시대를 마감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되었습니다.

1668년, 바로 사랑하는 유일한 직계 가족이자 아들인 티토의 사망이었습니다.

 

 

4. 화가의 무덤을 향한 평가

 

비록 렘브란트는 생전 20가지가 넘는 법적문제부터 여성관계 문제 등 여러 논란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예술계에 끼친 영향력은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위대합니다.
한 평론가는 '이미 그의 이름 자체가 위대함의 대명사다.'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이는 절대 과찬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연히 길을 가다 그의 그림을 봐도 알아보지는 못 할 겁니다.
하지만 누군가 '이 그림이 렘브란트의 것이다.' 라고 말하면 누구나 '아! 그 유명한 화가.' 라고 할 것입니다.

 

 

 

 

 

비록 렘브란트의 말년은 그의 작품처럼 금빛으로 반짝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작품을 향한 절대성과 경외심을 일으키는 실존적인 강렬함은

그 어떤 예술가보다도 반짝이는 금빛으로 가득 차 있음을 우린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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