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부셰 (François Boucher)
부셰의 작품은 프랑스 로코코의 분위기를 의인화하고 구체화하여
한 세기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람 중 한명이다.
-Goncourt brothers
프랑수아 부셰에 대하여
목차
1. 프랑스 로코코를 맞이하는 아침
2. 예술가 부셰
3. 퐁파두르 후작부인과 명성
4. 비판으로 얼룩진 명성
1. 프랑스 로코코를 맞이하는 아침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부셰(1703년 9월 29일 ~ 1770년 5월 30일)는 화가 니콜라스 부셰의 아들로, 그의 아버지로부터 첫 미술 교습을 받게 됩니다. 17세의 나이에 그의 천부적인 능력을 알아본 화가들은 자신의 견습생으로 지내도록 하였고 부셰는 그들의 밑에서 실력을 쌓았습니다.
2. 예술가 부셰
17세기 고전 화가들의 이상적 풍경과 달리, 숙녀들과 신사들은 아르카디아적인 배경에서 농민 복장을 하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세트장과 같은 농촌에서 (요즘 말로 서민놀이에 가까운) 순진한 놀이를 즐겼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동시대에 목가적인 연극의 발전과도 관련이 깊습니다.
부셰의 초기 작품들은 피터 폴 루벤스와 앙투안 와토와 같은 예술가들로부터 영감을 얻어 자연과 풍경에 대해 소박하고 평화로우며 서정적인 분위기를 우아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타고난 표현력은 열정적이고 친밀하며 애틋함이 느껴지는 에로티즘 스타일이었기에 전통적인 시골의 순수함을 표현하는 것을 포기하게 됩니다.
후에 그만의 스타일로 자리 잡은 화풍은 부르주아의 방과 침실, 내실을 은근슬쩍 엿보듯 그린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림 속 공간들에서 부셰는 유쾌하면서도 화사한 색채와 그림 속 주제들의 일상생활 비밀들을 보는 듯한 분위기를 성공적으로 잡아내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화려함에 지르는 탄성과 인물들의 비밀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게 합니다.
그는 다작을 하는 화가로도 유명하지만 다양한 디자인과 제작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그중 극장 의상과 세트를 디자인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경력으로는 1737년에 큐피드와 프시케의 이야기 모음집을 의뢰를 받았을 때입니다. 보바이스 태피스트리(벽걸이 융단) 작업장에서 부셰는 1741년부터 1742년까지 프시케와 바느질하는 사람 태피스트리와 같은 시리즈 디자인을 제작했습니다.
부셰는 작품 제작뿐만 아니라 그림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마라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신고전주의 화가 자크-루이 다비드가 그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 중 한 명입니다..
3. 후원자 퐁파두르 후작부인
당시에는 관능적인 페트 갈랑트의 양식의 회화가 성립되었습니다. 이 양식은 궁정 사회에서 높이 평가되었고 루이 15세의 정부인 퐁파두르 후작 부인의 취향이기도 했습니다. 마침 화가 프랑수아 부셰의 작품은 생기 있고 깃털처럼 가벼우며 밝게 빛나는 관능적인 갈랑트 양식 그 자체였으니 퐁파두르 후작 부인은 그의 작품을 놓칠 리가 없었습니다.
"로코코의 대모"로 언급되는 퐁파두르 후작 부인은 그의 작품을 매우 숭배했습니다. 게다가 그녀의 예술적 취향은 한 시대의 트렌드 그 자체였기 때문에 그런 그녀가 찬양한 부셰의 작품 역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셰의 실력도 뛰어났지만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는 것에 가속도를 붙이게 한 것은 퐁파두르 부인의 영향력도 한몫한 것입니다.
그의 명성은 왕실 화가 'Peintre du Roi'가 되면서 더욱 화려해졌습니다.
4. 비판으로 얼룩진 명성
<소파에 기대어 있는 누드 The Blonde Odalisque or Resting Girl>라는 작품을 제작 후 그 림 속 모델과 왕의 스캔들로 미술 평론가 데니스 디드로는 부셰를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부유한 수집가들로부터 받은 은밀한 작품 의뢰는 떨어지고 있는 그의 명성을 더욱 곤두박질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부셰의 말년은 수많은 비판을 받으며 막을 내리게 됩니다.
1770년 5월 30일 부셰는 고향인 파리에서 사망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열렬한 후원자였던 퐁파두르 부인의 이름과 함께 프랑스 로코코 양식을 대표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18세기 가장 유명한 화가라 불렸던 그도 예술가로서의 삶은 명예롭게 마감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침 커피 The Breakfast>에서 보이는 평화롭고 화목한 화가의 가족들을 보면
그가 인간으로서 그의 가족들에게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