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올스턴(Washington Allston)
아내를 잃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향수병에 걸린 올스턴은 고향으로 돌아가 그림을 그렸다. 훗 날 그는 북미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화가가 되었다.
워싱턴 올스턴에 대하여
1. 인간 올스턴 워싱턴의 인생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와카모 패리시에 있는 한 벼 농장에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그 아기에게 미국 혁명의 지도적인 장군 워싱턴을 기리기 위해 워싱턴 올스턴(Washington Allston)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워싱턴 올스턴(1779년 11월 5일 ~ 1843년 7월 9일)은 하버드를 졸업 후 런던에 정착했습니다.
그 곳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촬영한 사진으로 수상을 하고 명성을 얻었고, 시인으로 활동하며 자신이 쓴 책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로 바쁜 일상을 보내는 그였지만 1815년 아내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타지에 홀로 남은 그는 밀려오는 슬픔과 외로움 그리고 고향 미국을 향한 그리움에 향수병까지 걸렸습니다.
결국 1818년 미국으로 돌아온 올스턴은 그림 공부를 하며 1827년 자신이 그린 그림 12점으로 첫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1841년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쓴 로맨스 소설과 1850년에 예술과 시에 관한 책을 출판했지만 그가 그린 그림만큼의 호응은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2. 화가 워싱턴 올스턴의 인생
화가로서의 올스턴의 삶은 많은 이들의 열렬한 호응으로 가득했습니다.
극적인 주제에 대한 도전과 빛에 대한 표현, 분위기 있는 색을 대담하게 사용하는 걸로 유명했는데 특히 성서를 주제로 한 초상화들과 유화그림을 즐겨 그렸습니다.
그의 화풍은 극적인 색상 대비를 보여주는 베네치아 르네상스 예술가들을 닮았다 하여
사람들은 ‘아메리칸 *티티안(American Titian)’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티치아노 베첼리오(1488년/90년경 ~ 1576년 8월 27일) 이탈리아의 화가로 영어로는 티티안으로 알려져 있다.
뛰어난 실력과 과감한 화풍으로 미국 풍경화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그의 그림은 풍경화의 미국 낭만주의 운동을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올스턴은 1843년 7월 9일 6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훗 날 그를 존경하는 이 중 한 명인 보스턴의 화가 월리엄 모리스 헌트(William Morris Hunt)는 1866년 보스턴에 올스턴 클럽(Allston Club)을 설립하였고, 예술 수업에서 올스턴의 기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올스턴이 세상을 떠난 지 17년 후 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Henry Wadsworth Longfellow)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은 평생을 달콤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저는 올스턴을 생각하지 않고는 캠브릿지 항구를 통과하지 않습니다.
그에 대한 기억은 서랍 속의 모과이며 분위기를 향기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의 그림은
지금도 많은 이들의 가슴에 몽환적이고 찬란한 풍경을 수놓아줍니다..
그건 화려한 화풍 속 혼자라는 슬픔과 외로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한 예술가의 감정이 깃들여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