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즈 무일롱 (Louise Moillon)
바로크 시대의 미술 시장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장르 정물화가 등장하였다.
이는 여성 화가들이 매우 선호했던 장르였으며 그중 프랑스 화가 루이즈 무일롱은 대가의 솜씨를 보여주며 정물화가로서 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
루이즈 무일롱에 대하여
프랑스 여성 화가
1610년 파리의 엄격한 *칼뱅주의자 집안에서 태어난 루이즈 무일롱(1610–1696)은 파리의 생제르맹데프레에서 자랐습니다.
*칼뱅주의(Calvinism): 요한 칼뱅과 다른 종교개혁 시대의 신학자들이 세운 신학적 전통과 기독교 실천의 형태를 따르는 개신교의 주요한 한 분야.
그녀가 살던 지역은 네덜란드 화가들의 작품을 수집하는 것이 유행하였는데 이는 무일롱의 화풍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 배경 중 하나였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화가이자 미술상인이었는데 아버지로부터 그림의 기초를 배웠지만 그녀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기도 전에 일찍 여의게 됩니다. 후에 어머니는 또다른 화가이자 미술상인과 재혼했고 무일롱 역시 미술 교육을 계속 받으며 예술적 경험을 확대해 갔습니다.
바로크 시대의 정물화가의 명성
화가가 된 무일롱은 바로크 시대의 프랑스 정물화가가 됩니다. 보통 캔버스나 나무 판넬에 유화 물감으로 작업했으며 테이블 위에 놓인 과일들을 포함한 정물을 그렸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어두운 배경에 이국적인 과일의 질감이 빛을 발하는 것 같은 고요함과 예리한 디테일이 살아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실제를 보는 듯한 환상을 주는데 이는 그림을 사실적으로 만들기 위해 *트롬펠로유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트롬펠로유 Trompe-l'œil : 2차원의 주제들을 착시 현상으로 마치 3차원에 있는 듯한 느낌을 보여주는 효과
가끔 그녀의 작품 중에는 <과일과 채소 비용을 지불하는 여인 The Fruit and Vegetable Seller>과 같은 작품처럼 사람이 등장하는 주제도 있는데 1650년 이전에 인물과 정물을 결합한 최초의 프랑스 정물화가 중 한 명이기도 했습니다.
뛰어난 실력은 인정받아 프랑스 귀족들 뿐만 아니라 영국의 찰스 1세에 의해 구입되면서 그녀는 당대 최고의 정물화가 중 한 명으로 널리 명성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무일롱이 당대 화가들에게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은 조르주 드 스쿠데리가 남긴 기록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 기록속에서는 정물화가 자크 리나르와 피터 반 브뤼겔 그리고 루이즈 무일롱. 이 세 사람을 각자 미켈란젤로, 라파엘, 티치앙에 빗대며 실력을 찬양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그림은 대부분 1630년대에 그려졌고 1640년대에 결혼 후 더 이상 작품 활동을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붓을 놓은 인간 무일롱의 말년
1640년대 목재 상인과 결혼한 무일롱은 결혼 후에 작품 활동을 한 기록이 없다고 합니다. 1685년 가톨릭으로 개종되도록 강요당한 역사적 사건은 그녀의 가족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남편이 가톨릭 개종을 거부해 감옥에 보내졌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도 무일롱은 그림을 그리지 않았고 시간이 흘러 1696년 프랑스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그녀의 장례식은 가톨릭 교회에서 치러졌다고 합니다.
비록 짧은 활동을 하였지만 실물을 보는 듯한 환상을 주기 위해
끝없는 노력과 연구를 한 그녀의 그림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